주의: 잔인한 장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단 아래 동영상을 보자.
우리가 먹는 닭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위 동영상이 보여준다. 한국의 생산방식은 어떤지 잘 모르겠으나, 그래도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1. 동물은 사람과 교감한다.
사진 속에는 나의 닭도 있고 옆집에 상구네 닭도 같이 섞여있다.
위에 사진을 보면 주인을 알아보고 닭이 몰려온 모습이다. 주인이 밥이라도 줄까 싶어서 저렇게 모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닭들이 집 근처 20m정도 밖까지 뛰어나오기도 한다. 다른 닭은 나를 환대하지 않는다. 오직 나의 닭과 옆지 상구네 닭만 날 알아보고 뛰어나온다. 수업을 마치고 힘든 발걸음을 옮기며 집에 들어가도 닭이 반겨줘서 얼마나 위로가 됐는지 모른다. 난 닭에게서도 충분히 정을 느꼈고, 위로받았다.
2. 닭의 강한 모성애를 느껴봤는가?
일단 토종닭을 정의해 보자. 우리가 흔히 아는 정의는 '시골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사는 닭'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토종닭이란 것은 스스로 알을 낳고 자신의 자손을 다른 인간의 도움 없이 부화시킬 수 있는 닭을 말한다. 토종닭은 평소에 알을 낳지 않는다. 짝짓기를 해야 알을 낳기 시작한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유정란이다. 알을 낳고, 10~15개가 되면 품기 시작한다. 처음 2~3일은 앉았다 일어났다 매우 자주 자리를 비운다. 그러나 나머지 18
~19일은 거의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 사람이 다가와서 자신의 몸을 만지기 전까지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정말 온종일 앉아있는다. 아주 간혹 일어나는 경우가 있지만 정말 목격하기 힘들다. 그리고 병아리가 태어나면 병아리가 중병아리가 될 때까지 곁에서 보살핀다.
자신의 자식들을 자신의 몸속에 감추고 돌보는 나의 닭.ㅋㅋ |
자신의 자식을 보살피는 기간에는 주인이 다가와도 화를 내며 심지어 공격까지 서슴지 않는다. 매번 주변 닭에게 먹이를 빼앗기던 닭도 이 기간에는 강력한 모성으로 먹이를 확보하고 주변 닭으로부터 자신의 병아리를 사수한다. 간혹 다른 어미 닭이 자신의 병아리가 아니면 쪼아 죽이기도 하기 때문에 매우 민감한 시기다. 비가 잔뜩 내려도 자신의 몸은 젖을지언정 병아리는 물 한 방울 안 묻도록 한다.
탄자니아에서는 보통 닭을 가두고 키우지 않는다. |
3. 인간이 고기를 취할 때
육식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아마 인류의 시작부터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육식 문화는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시대에 따라서 사람이 먹었던 고기는 변화해왔다. 탄자니아 몇몇 부족은 쥐고기를 먹기도 하고, 불과 150여 년 전 미국에서는 비둘기고기를 너무 먹어서 멸종되기도 했다.
내가 닭을 잡는 모습. |
사람은 동물을 죽이고, 먹는 존재다. 전 세계인이 모두 채식주의자가 되기 전까지는 이 사실이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인간은 동물의 생명을 통제하고, 개체 수를 증가시키고 싶어한다는 사실. 동물이 왜 그렇게 통제당해야 하나? 그런 통제당할 이유가 없다. 그들도 짝짓기하고 싶어 하고, 들판에서 뛰어놀고 싶어한다. 우리는 그런 그들을 통제한다. 그냥 우린 그들이 먹고 싶어 살육을 멈추지 않을 뿐이다. 인간이란 그런 동물이다.
마무으리.
사람은 동물과 교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모성애에 감동받기도 한다. 그러나 육식을 멈추지 않는다. 영양보충 혹은 즐거운 식사를 위해 우리는 닭의 생명을 앗아간다. 사람이란 동물은 이런 존재다. 언제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어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욕구를 위해 뭐든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적어도 고기를 섭취할 때, 닭이 어떻게 내 뱃속에 들어오게 됐는지 생각해 볼 기회는 가져야 한다는 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지금 현대인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여러 각도로 돌아볼 기회가 없다. 닭고기를 먹을 때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 밥을 먹을 때 농부의 노고를 떠올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 사람들은 마트에서 닭을 구입할 때 진열장에 놓인 음식의 한 종류라고 생각할 뿐이다. 시장에서 살아있는 닭이 도살되고 내장이 제거되는 모습을 더는 보기 힘든데, 이는 마치 무임승차와 같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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